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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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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청소년수련관 [카드뉴스]남양주시 청소년들에게 전하는 '다시보는 6·25'
담당부서 : NCUC03 > 청소년수련관 조회수 : 571 등록일자 : 2020-06-01

남양주시 청소년들에게 전하는 다시보는 6.25 / [배경] 일본 패망 후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알타 등에서 이뤄진 국제 합의가 있었으나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분할한 미국과 소련 군정에 의해 한반도는 잠정분단 상태가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으로 유엔 감시 아래 자유총선서를 실시해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48년 5월 북한은 조선헌법을 선포하고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출범하였다. / [북한의 남침 (1950.6.25.~9.15.) 북한은 인민군 창설 후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남침준비를 하였고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 감행,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함락시켰다. 유엔은 사상 최초로 집단 안전보장 조치에 따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한 유엔군 파병 결정하였다. / [북한의 남침 (1950.6.25.~9.15.)] 미군 24사단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미군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해 1950년 7월 4일 평택-제천-울진을 잇는 선에서 철수하던 한국군과 함께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8월 초 유엔군과 한국군은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해 방어 태세를 돌입하였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은 북한군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 [국군과 연합군의 반격 (1950.9.15.~10.25.)]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힘입어 반격작전으로 전환, 전쟁발발 97일 만인 9월 28일 수도 탈환에 성공 후 한국군 3사단이 10월 1일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고 뒤이어 유엔군도 북진 작전을 개시하여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은 10월 24일 유엔군이 청천강변에 도착하자 국경선까지 총추격전을 독려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또다른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 [중공군 개입과 재반격 (1950.11.25.~1951.6.23.)] 1950년 10월 25일 유엔군이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을 때 중공군의 1차 공세가 시작되었고 뒤이은 2차공세(11월25일~12월24일), 3차 공세(12월31일~1951년1월8일)로 38선까지 돌파하였다. / [중공군 개입과 재반격 (1950.11.25.~1951.6.23.)] 유엔군은 결국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전략적 후퇴를 한 후 평택-삼척선까지 철수해 반격 작전을 준비하다 1월 25일 일제히 작전에 돌입하고 전쟁의 주도권을 회복하여 3월 15일 수도 서울을, 3월 말 38도선을 재탈환하였다. / [교착전과 휴전 (1951.6.23.~1953.7.27.)] 1951년 7월 10일 미국과 소련이 휴전회담을 시작하면서 6.25전쟁은 회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제한전 성격의 전투로 바뀌었으며 휴전 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성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이면서 엄청난 비용과 인명손실을 입었다. / [교착전과 휴전 (1951.6.23.~1953.7.27.)] 6.25전쟁은 발발한지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북한군, 중공군, 유엔군 측의 미군대표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면서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분단을 고착화하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어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 YOUTHCENTER YES NAMYANGJU /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 내용참고 : 시선뉴스 http://www.sisu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9649